희양산, 기호가 실감으로
희양산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높이는 998미터이고 소백산맥에 속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백화산 서쪽으로는 장성봉, 대야산, 조항산 등과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시루봉이 있습니다. 문경분지의 서쪽을 이루고 있습니다. 희양산의 동, 서, 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돌산입니다. 희양산은 거대한 암봉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바위가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이 난다고 합니다. 햇빛 희曦자에 태양 양陽자를 쓰는 이유입니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푸근함과는 달리 희양산은 산세가 험합니다. 암릉 구간에서는 바위를 오르는 스릴도 맛볼 수 있습니다. 희양산 정상의 거대한 고래등걸 같은 봉암의 밑은 천 길 낭떠러지입니다. 낭떠러지 위에서 산 너머의 대간은 첩첩산중이었고 조망이 수려했습니다. 희양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열두 판의 꽃잎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중앙에 봉암사가 있습니다. 엄격한 수행도량인 봉암사는 1982년부터 산문을 폐쇄하여 평소에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으며 석가탄신일에만 개방됩니다. 산행은 은티마을에서 시작했습니다. 주막집 앞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오르니 팔각정이 나왔습니다. 직진하여 희양산을 올랐습니다.
은티마을은 풍수지리학상 자궁혈 형상을 이루고 있어 천지간의 기를 모아 생명이 잉태하는 땅모양이라고 합니다. 은티마을은 조선 초기 산골 마을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해 김 씨들이 피란을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깊은 산속 무릉도원으로 알려진 은티마을은 조선 말기에는 천주교 탄압과 일제강점기에는 의인들의 은신처였고 6.25 사변 때에도 화를 면했다는 명당 중의 명당인 땅입니다. 은티마을 초입에는 기풍 있는 노송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습니다. 은티마을은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습니다. 계곡의 쎈 음기를 막기 위한 풍수의 하나로 남근석과 전나무 등을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희양산 구왕산 마분봉 악휘봉등을 산행하기 위해서는 주로 이 마을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늘이 맑다. 볕이 따뜻하다. 햇살이 빛난다. 물소리가 간지럽다. 어린잎이 하늘거린다. 빵 굽는 냄새가 고소하다. 초코케이크가 달콤하다. 버들강아지 솜털이 부드럽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기호를 조합하여 단어가 되었고, 단어가 문장을 이루어 그것을 읽었을 뿐인데 마음이 움직이곤 했습니다. 오감이 꿈틀거리더니 세포마다 따뜻한 무엇이 퍼졌습니다. 햇살이, 달콤한 것이, 부드러운 감촉이 내 안으로 들어와 마음결 따라 따뜻하게 흐르더니 나는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기호를 읽었을 뿐인데 ’ 하늘에, 볕에, 햇살에, 물소리에, 어린잎에, 빵 구워지는 냄새에, 초코케이크에, 버들강아지의 솜털‘에 내 마음이 반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햇살이라는 단어를 학습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햇살의 느낌을 먼저 알았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양산 정상에 앉아 그런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아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희양산에서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늘, 볕, 물소리 등의 단어는 언제부터 하늘이고 볕이고 물소리였을까요. 하늘을 하늘로, 볕을 볕으로, 물소리를 물소리로 동의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습이 역사로 이어져 우리를 흘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공감하고 소통하고 있습니다. 공감에는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사월 마지막주 토요일 희양산에 올랐습니다. 희양산은 나에게 어떤 산으로 기억될까요.
하늘이 파랗게 맑았고 그 하늘에 솜털 구름이 줄지어 떠 있었습니다. 산행 전날 비가 온 덕분에 계곡에는 물이 충분히 흘러 산을 오르면서 물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맑아져 어느새 피로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진달래 꽃잎이 하늘거렸고 그 옆 굴참나무 가지에는 이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습니다. 어린것은 어찌 이리도 예쁠까라고도 했습니다. 햇살이 충분해 그것에 닿은 것들 마다 연둣빛으로 분홍빛으로 마음껏 빛났습니다. 산길 바닥에 납작한 양지꽃도 나무 틈으로 술래잡기하듯 비집고 내려온 볕을 쬐며 노랗게 빛났습니다. 바위틈에 별꽃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몸집이 작을 것이 분명한 새가 머리 위를 지나며 뽀로롱 소리를 냈습니다. 젖은 땅, 잘 썩고 있는 낙엽 냄새를 큼큼거렸습니다. 또 뭐가 있었을까요. 아, 대간의 등줄기를 바라보았습니다. 볕이 따뜻한 바위 위에 팔뚝을 내놓고 앉아 연녹색의 강건한 선을 눈으로 걸으며 저기가 대간길이구나 했답니다. 일부겠지만 희양산에서 내가 몸으로 알은 것들이었습니다. 미처 보지 못한 곳, 미처 듣지 못한 소리, 미처 느끼지 못한 향기 등은 또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까요. 희양산은 역시 속리산 구간이었습니다. 암릉과 로프가 계속 나타났습니다. 어느 구간에서는 암릉의 경사가 급격하여 로프를 잡고도 쩔쩔맸습니다. 두려움에 발을 확실하게 딛지 못해서 몸이 빙글 도는 아찔할 경험도 했습니다.
은티마을에서 시작한 희양산의 산행은 은티마을에서 종료했습니다. 올라갈 때 본 길과 내려올 때 본 길은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했고 처음 겪는 길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희양산을 가기 전에 희양산은 기호에 불과했으나 산행을 마치고 백두대간에 속하는 바위산인 희양산을 실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양산은 기호에서 실감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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