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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남해 바래길 10코스와 다랭이 마을

by 힘월드 2024. 4. 11.

 

다랭이 마을
다랭이 마을

남해 바래길 10코스와 다랭이 마을

 

경상남도 남해를 500년 전부터 화전(花田)’이라 불렀습니다. 꽃 형상을 한 밭이라는 뜻입니다.

바래길을 걷다 보면 바다가 바로 발밑이지만 특이하게도 어선 한 척 볼 수 없었습니다. 가파른 해안 절벽을 끼고 있어 선착장을 만들 수 없던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업 대신 농사를 택할 수밖에 없어 잡초가 무성한 산비탈을 일궈 논으로 바꿔 나갔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 논의 모양도 들쑥날쑥이고 높이도 제멋대로 생겼습니다. 다랭이 논을 보고있자면 그것을 일구고 경작했을 그들의 고된 삶이 투영되었습니다.

평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면적의 경작지로 삶을 이어나가야 했으니. 넉넉한 수확량일리 없어 궁핍했을 것이었습니다. 그랬던 곳이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바래길과 다랭이 마을에서의 하루는 고즈넉했고 정겹게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남해 바래길은 본선 16개의 코스와 지선 4개의 코스로 240킬로미터에 달합니다. 처음에는 다랭이 지겟 길, 말발굽 길, 고사리밭 길, 동대만 진지리 길 등 4개 구간 55킬로미터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코스도 세분되고 길이도 확장되었습니다. 제주 올레길이 425킬로미터라고 하니 그 절반을 넘는 길입니다. ‘바래는 남해 토속어입니다. 어머니가 먹거리를 마련하게 위해 조개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뜻한다고 합니다. ‘바래 간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다랭이 마을은 해안 절벽에 위치한 마을이라 바래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안으로 채취를 나가는 대신 다랭이 마을 사람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석축을 쌓고 경작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108680개의 계단식 논과 마늘밭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중 10코스 앵강다숲길은 원천마을부터 두곡과 월포해변을 거쳐 홍해 해우라지마을을 지나 가천 다랭이마을까지입니다. 총17.7총 17.7킬로미터의 길이입니다. 원래는 가천마을이었으나 다랭이 논으로 알려지면서 가천마을에서 다랭이마을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남해에 도착하여 금산 보리암을 들렀다 걷는 여정이라 10코스 전체를 다 걷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월포해변에서부터 숙박을 예약한 다랭이 마을까지만 걷기로 했습니다.

 

다랭이 논은 다랑논, 논다랑이라고도 합니다. 다랭이 논은 산자락에 좁고 길게 형성된 계단식 논입니다. 다랭이 논의 역사는 논농사의 역사와 그 기원이 같아서 그 역사가 11천 년이 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다랭이 논은 인구의 증가를 농지가 따라가지 못해 발달했다고 합니다. 논 위에 물이 흔하면 찰벼와 메벼를 심을 수 있고 마른땅에는 조와 보리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랭이 논 상류에는 작은 저수지가 확보되어 있는 곳이 많답니다. 우리나라도 70%가 산지인지라 미곡 농사를 위해 다랭이 논이 발달한 편이라고 합니다.

 

논두렁길과 해안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길은 아기자기했고 남해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로 곁에 두고 걸을 수 있어서 걷는 내내 자연의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다랭이마을이라고 안내 받지 않아도 층계처럼 겹겹이 쌓인 논을 보니 저절로 아하다랭이하고 떠올렸습니다.

다랭이마을은 깎아지른 산의 경사를 오랜 세월 다듬고 다듬어서 생긴 마을이 맞았습니다.

다랭이 논의 생김은 가까이에서 보니 기계를 이용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사람의 손과 호미나 삽 등 약간의 보조 기능이 있는 도구로만 만들었을 것이라고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랭이 논들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남해의 다랭이 논은 주로 형태가 일전하지 않은 곡선이었고 위의 논과 아래의 논 사이를 한 걸음으로 이동하기에도 높은 불편한 축대가 있었습니다.

논의 규모도 한 평에서 열 평이나 될까 말까 했습니다.. 넓이도 모양도 제 각각인 옹색한 평지였습니다. 가랑이를 잔뜩 올리며 층을 옮겨 다녀야 할 만큼의 만만하지 않은 높이로 켜켜이 돌담이 쌓여 있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돌들의 크기는 어찌 그리 작던지. 손품이 만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층과 층 사이를 일부러 높게 만들려고 다른 곳에서 돌을 가져왔을 리는 만무하고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산을 파헤치다 보니 캐냈던 돌들일 것입니다. 축대를 높게 쌓기에 충분한 돌을 캐낼 수 있을 만큼 돌투성인 돌산이었을 것입니다.

척박한 돌땅이 농지가 되어서 식구들 입에 풀칠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람은 돌멩이 사이에 접착제가 되어서 차곡차곡 쌓였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지금의 다랭이 논에는 벼를 포함한 농작물이 없었습니다다랭이 논을 만들었을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어느새 세월이 흐르고 흘러 사라져 버렸고 팬션과 민박 등의 숙박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해안가 너럭바위에 앉았습니다. 모래사장 시원하게 펼쳐진 넉넉한 바다는 아니었지만 발밑에서 찰랑이는 물이 맑았습니다. 화물선의 오렌지색이 수평선 사이에 있었습니다. 찰랑이는 소리에 집중하고 싶어서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오는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소리 따라 마음까지 맑아졌습니다.

 

저녁 식사 후 렌턴을 챙겨 산책을 나섰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을 전등과 함께 동행자와 걸었습니다.

낮에 보아 두었던 바닷가 근처 팔각정에 도착했습니다. 잔소름이 피부에 가득했습니다. 동행이 있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소리를 떠나 물 가까이 가니 물소리 밖에 안 들렸습니다. 그곳의 파도는 여러 개의 섬을 거쳐 도착한 것인지라 기세가 약해져서 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귀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잘 들리는 소리그런 소리였습니다. 그것이 파도 소리라서 그런 건 아니였을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귀 기울이게 하는 데는 클 혹은 많은 소리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다랭이 마을의 밤이 조용하게 깊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