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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계획은 계획일 뿐, 통영 욕지도

by 힘월드 2024. 4. 7.

계획은 계획일 뿐, 통영 욕지도

욕지도
욕지도

 

 

어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상특보를 열어보니 남해안과 제주에 호우주의보와 풍랑주의보가 발효되었습니다.

어제 섬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지금쯤 어땠을까여러 가지로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섬에 들 곤하면, “발이 묶여 한 일주일쯤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섬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했던 입찬말이었습니다.

말은 그리해도 계획대로 나갈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을 여행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날씨를 검색하고 숙소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생겼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섬의 날씨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전 일기예보를 무용하게 만들었습니다.

날씨는 생물인 것 같습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니까요.

특히 섬의 날씨는 더 종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어찌하여 부랴부랴 안개가 자욱한 섬을 잘 빠져나와

빗소리를 들으면 1박 2일 섬여행을 떠올리면서 낯익은 일상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진저리를 치곤 하던 것은 아마도 배부른 투정이었었나 봅니다.

톱니 하나가 빠져 삐끗했다면 잉여처럼 섬에 남은 우리들은 어찌하고 있었을까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야포-일출봉-망대봉-흔곡-할매바위-대기봉-태고암-천왕봉-시금치재-약과봉-도동해수욕장>

욕지도에서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섬으로 출발하는 날, 비 예보가 있었으나 전날의 비로 날씨가 화창했습니다.

미세먼지도 비에 쓸려 나갔는지 유리알처럼 밝은 날이라 덩달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나 빗방울이 차 지붕에 부딪치는 소리가 낭만적이지만 어딘가로 떠날 때 비는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계획의 첫 단계. 승선에 성공했습니다. 통영여객터미널에서 욕지도행 배에 탔습니다.

여객선은 짙푸른 바다 위에 비행운처럼 궤적을 그리며 달렸습니다.

바다의 고유한 물결과는 관계없는 독자적인 물결, 여객선이 만들어낸 무늬였습니다.

바다가 가로로 그린 파란 물결 위로 세로로 흰 줄이 생겼습니다.

역행하는 느낌이 들어 배에 탔을 뿐인데 도전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는 새우깡을 던지는 사람들과

그 새우깡을 향해 달려드는 괭이갈매기와 목적지를 향하는 여객선이 끼어 있었습니다.

여객선 갑판 위에 활짝 핀 봄꽃처럼 웃고 서 있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엔진 소리에 묻히기는 하지만 감탄 소리에 귀가 즐거웠습니다.

섬 여행의 시작이 좋았습니다.

 

욕지도는 어업도 성하고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는 섬인 것 같았습니다.

섬을 순환하는 버스에는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가득했습니다.

기사님은 관광객들을 주민들이 불편해하니 조심해 달라며 버스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섬의 명소 안내를 능숙하게 하는 기사님의 품새는 관광안내원 못지않았습니다.

삶터가 섬이니 주민들은 생업인 어부의 삶에 집중했을 것이고 외지 사람들은 살만해지니 풍광이 멋진 곳으로 찾아들었을 것이고, 그런 역사가 굽이굽이 그려졌습니다.

현재무엇이 먼저인지 무엇이 중헌 지는 각자의 위치에 의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객이라 섬에서 여행과 관계있는 사람들과 풍경을 주로 만나고 왔습니다.

 

섬은 의외로 바다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어서 해변도 많을 것 같고 해변이 아니더라도 바다로의 접근이 쉬울 것 같은데 섬에 갈 때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섬의 오솔길을 걷다가 바닷물에 손을 넣어보고 발도 담그면서 휴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섬은 절벽이 많고 방파제로 막혀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발밑에서 곧바로 짙푸른 바다를 만날 수 있어 시원한 풍광이 마음을 식혀주었습니다.

 

욕지도의 첫 번째 전망지도 그랬습니다.

언덕에 올라서서 절벽 밑을 보거나 시선을 멀리하고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다 표면에는 별무리가 은하수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물결에 비친 햇살은 별이 되어 눈이 부셨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정수리 위에서 해가 빛나고 바다에는 별무더기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야를 막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결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은 하늘과 맞닿아 있을 뿐.

이것이 전부이어도 섬에 온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 눈동자마저 바다색으로 변해 있었을 것입니다.

진력이 날만큼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게 우리들의 계획이니 계획에 맞추어 또 걸어야 했습니다.

터널처럼 생긴 숲도 지나고 오솔길을 치고 오르기도 하고 길가에 핀 낯선 야생화에 눈도 맞추느라 바빴습니다. 이런 일들로 바쁜 삶은 어쩌다 한 번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것이겠지요.

 

천왕봉에 올라 안개가 바다 위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위치에서 안개가 무더기로 흐르면서 사방을 희뿌옇게 감쌌습니다.

걸으면서 틈틈이 보았던 바다에 동그라미로 떠 있는 고등어 가두리 양식장도

유채꽃이 만발한 들판도 산벚꽃이 핀 앞산도 다 가려 버렸습니다.

급기야는 안개가 내 속으로 파고들었으니 나마저도 안갯속에 감추어졌을 것입니다.

데크에서 비박을 준비하는 한 사람에게 인사를 남기고 숙소로 가는 길을 서둘렀습니다.

섬에서 혼자 안개 낀 날 비박이라니.

사람 사는 모습이 참 다양하다 싶었습니다.

육지에서 뚝 떨어진 섬에서 하루를 혼자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면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숙소에 도착해 서울에서부터 들고 온 것으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 섬을 나가기 전 이 섬 음식을 무엇이든 먹어볼 것입니다.

 

창을 여니 새소리가 들렸습니다안개 가득한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소리였습니다.

전선줄에 앉아 지저귀는 새 모양이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 같았습니다.

 

7시에 숙소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펜션 주인장께서 아침 배가 결항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어째심상치 않았습니다.

버스에 몸을 싣고 항에 도착해서 예약한 배가 뜨기를 기다렸습니다.

다음 배다음 배다음 배...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계획하며 떠난 길에 계획된 것이 없는 시간은 아무것도 못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차라리 하루 동안 뜨지 못한다면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았을 텐데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배가 언제 뜰지 몰라 기다리기만 해야 했습니다.

다음 날은 출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꼭 처리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속없는 안개는 짙어졌다 옅어졌다가를 반복했고 그 안개 따라 애를 끓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내일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날이면 풍랑주의보가 있어서 나가지 못하면 적어도 이틀은 묶여 있어야 한다는 현지인들의 말도 들렸습니다.

2시가 넘어가도 안개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느 정도 포기한 사람들은 각자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동네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좁은 골목의 집들은 낡은 편이었지만 거리를 깨끗했습니다.

골목을 지나니 예쁜 공소가 나타났습니다.

욕지 공소였습니다.

도유화(도자의 유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건축물로 유명하답니다.

동화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노란색과 파란색의 조화가 흐드러진 튤립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동화속 주인공인 것 같았습니다.

욕지도는 고구마가 유명한지 고구마빵도 고구마막걸리도 있었습니다.

 

마을 탐방을 끝내고 항구로 돌아왔지만 출항 소식은 없었습니다.

욕지도는 고등어회가 맛있다는 말을 들고 포구 가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등어회를 시키면 뜰채로 잡아와 그 자리에서 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고등어회가 처음이었는데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곁들인 소주 덕이었을까요.

자연이 주는 횡포도 기꺼이 받아들여 즐기겠다는 마음을 먹자 내일은 내일이고 지금이 최고이다,라고, 마음이 넉넉해졌습니다.

 

조용하던 항구가 갑자기 어수선해졌습니다.

짐을 든 사람들이 뜀박질을 시작했습니다

계획했던 통영항은 아직이고 삼덕에서 배가 떴다고 했습니다

섬에서 나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준비를 서두르는데 통영에서는 결항이라고 내일을 준비하라는 문자가 마침 도착했습니다.

나갈 수 있을 때 나가자고 짐을 정리하고 달려서 줄을 서고 배에 올랐습니다.

안개 때문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뱃머리에는 네 사람의 운행 관계자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배 운항은 바람보다 안개가 더 무섭다고 옆에 있던 주민분이 말했습니다.

뱃고동 소리로 위치를 알려 주위를 환기시키며 배가 선착장에 닿았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