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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기쁨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달마산 도솔암.

by 힘월드 2024. 4. 5.

 기쁨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도솔암에서 본 하늘
도솔암에서 본 하늘

 

 

미켈란젤로는 밤새워 작품을 완성하고 집 밖을 나와 햇빛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심하게 좌절했다지요. 햇빛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상상해 보니 미켈란젤로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천재화가는 자연을 보고 좌절했다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통해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게 된 기쁨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발품을 팔았고 계절 변화에 민감했고 마음을 열어 감성을 벼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벼려진 기쁨은 예전만큼 보살피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납니다. 기쁨은 내 몸에 자리를 잘 잡았나 봅니다.

 

미황사-달마봉-대밭삼거리-떡봉-도솔암. 약 11.2킬로미터.

어느 봄날 남해의 산길을 걸었습니다. 길이보다 더 힘겨웠는데 그 이유는 바위와 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시작은 미황사입니다.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대흥사의 말사입니다. 우리나라 육지의 남쪽 끝에 있는 절입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 아름다울 미(美) 자를 취했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하는 황(黃) 자를 택한 것이라 합니다. 미황사 뒤에는 달마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1300년 전의 사찰이라 하니 역사 또한 깊습니다. 경내를 둘러봅니다. 남쪽이라 그런지 꽃들이 서울보다 조금 빠릅니다. 진달래와 벚꽃 등이 제법입니다. 이곳저곳 들러 보고 꽃과 나무도 둘러보고 산행을 위해 경내를 떠납니다.

 

미황사를 지나 달마봉을 지나 돌길 능선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넘으면 도솔암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규암이 많은 산이라 잔돌이 유난히 많습니다. 잔돌은 각이 날카롭습니다. 흙으로 덮인 오솔길이면 걷기 편했을 텐데 길이 척박한 편입니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자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돌끼리 또는 내 등산화와 부딪칩니다. 걷다 보니 어느덧 소리에도 익숙해져 무감각해집니다.. 잔돌만 많은 것이 아니라 바위도 많습니다. 때로 밧줄을 잡고 낑낑거리며 올라야 합니다. 덕분에 산행 내내 발걸음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발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달마산 정상은 바위투성이입니다. 월출산 같기도 공룡능선 같기도 합니다. 멋진 바위에 앉아 바람을 맞아봅니다. 땀방울이 묻은 머리카락이 소심하게 움직입니다. 모자를 벗어 바람이 나를 통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핍니다. 쌀뜨물을 뿌린 듯 멀건 공기 속. 발밑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풍경 맛집이라는 데 좀 아쉽긴 합니다. 먼저 온 적이 있던 일행이 이곳은 두륜산 방향이고 저곳은 해남과 완도사이이고 날이 좋으면 진도도 보인다고 연신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만 그저 뿌옇기만 해서 손가락 끝 방향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봅니다.

 

해지기 전에 산행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답니다. 발걸음은 빨라졌고 숨은 그림처럼 낮게 깔린 해남의 풍경은 찬찬히 들여다봐야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햇살이 순해졌다는 것은 곧 어두워질 것이라는 예보이기에 마음이 바쁩니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능선 꼭대기 어느 길.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졌습니다. 지면에서 손톱만큼 떨어진 곳에 잘 익은 홍시 한 알이 떠있습니다. 딱 홍시입니다. 모양도 크기도 색도. 홍시를 향해 몸을 돌리고 멈춰 서니 또 한 알이 있습니다. 한 알과 한 알이 아래위로 데칼코마니처럼 마주하고 있습니다. 능선에 선 눈높이 보다 낮은 하늘에 한 알 수면 위에 한 알. 저수지가 있습니다. 저수지 위에서 서로를 비추고 있습니다. 수식과 탄성이 나오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기쁨입니다. 아마도 뇌의 제일 깊은 곳에 자리한 것에서 반응이 나왔을 것입니다.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반응 말입니다. 감성을 벼리고 발품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에 쫓겨도 놓칠 수 없는 것은 놓쳐지지 않는가, 봅니다.

 

반영. 이런 반영도 있구나 싶습니다. 물에 비친 그림들이 원본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이건 좀 다른 아름다움입니다. 희뿌연 쌀뜨물을 배경으로 빛은 순화되고 색만 남은 것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갈 길이 바빠 오래 멈추지 못하고 길은 떠나지만 오른쪽의 반영을 흘끔거리며 걸음을 재촉합니다.

 

길은 길입니다. 걸어도 걸어도 이어지니 말입니다. 걷다 보면 끝이겠지,라고 투덜거리며 뻐근한 허벅지와 아픈 발바닥을 가야 하는 방향으로 내밉니다. 갑자기 바위기둥 옆 자갈길 끝에 숨어 있듯 암자 지붕이 보입니다. 도솔암이랍니다. 선경. 눈에는 경외심이 가득합니다. 입을 벌린 채 좌석에 끌리듯 그곳으로 다가갑니다. 쌀뜨물 같은 배경은 해남 풍경을 흐릿하게 감췄지만 도솔암은 더 몽환적으로 만듭니다. 탁한 노을의 그러데이션 위, 도솔암이 떠 있습니다. 바위에 둘러싸여 바위 위에 있는 암자라니. 이것이면 됐다, 싶습니다. 명당이 뭔지도 모르면서 명당이구나 하고 혼잣말을 합니다. 도솔암에 닿으려 돌계단을 지납니다. 한 뼘 경내에서 서성거립니다. 암자 옆 굽이진 고목에서 세월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나무는 이 자리에 언제부터 서 있었던 것일까 궁금합니다. 작은 암자에는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칠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깨끗한 단청도 도솔암의 역사이겠지요.

 

미황사와 도솔암. 크기와 모양 등이 아주 다른 절이었지만 달마산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땅 끝 최남단에 있는 절이라 바다와 어우러져 발걸음을 유혹합니다. 어느 봄날 이곳을 떠올리며 다시 찾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