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갈맷길, '격'하다는 것
해동용궁사, 송정해수욕장, 이기대길
‘격’하다는 것.
감격, 격변, 격랑, 격동, 격발, 격분, 격양, 격정, 격통…….
단어의 나열만으로도 무엇으로부터 심하게 움직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산여행, 그중 갈맷길의 일부를 걸었던 여행을 떠올리면 '격'했다는 것에 마땅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해동용궁사
서울에서 밤새 달려 새벽에 도착한 곳은 해동용궁사였습니다.
해동용궁사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사랑리에 있는 절입니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사찰로 알려져 있고 관음성지의 한 곳입니다.
격하게 감동시켜서 소리조차 숨죽이게 만들었던, 해동용궁사에서의 일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떠오르는 해의 조명 빛은 아래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늘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명을 받아 격변하는 하늘의 주인공은 구름이었습니다.
농익은 화가의 공력이 가득한 붓질처럼 구름이 하늘에 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청회색인가 했더니 청보라색인 것 같고 어느새 주황빛으로 변했습니다.
단어로만 알던 여명이었습니다.
여명이 얼마나 찰나에 가까운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해돋이를 시도했었지만 날씨가 받쳐주지 않아서 실패했던 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여명은 왜 이리 짧은 것이냐고 나란히 옆에 선 사람이 뾰로통하게 말하는 것이 들렸습니다.
일출, 여명 이런 것들은 우리들을 안달 나도록 합니다.
그리 짧을 것이면 그리 멋지나 말지 말입니다.
맛만 보여주고 줄행랑치듯이 달아나고 마니, 안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바닷가에 서있는 해동용궁사와 일출은 멋진 그림이었습니다.
환상이었다는 것.
볼 수 없는 상이 아니라 눈으로 소리로 마음으로 본 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래 기억할 듯했습니다.
해동용궁사에서 소원을 한 가지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소원이 뭔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아 제대로 빌지도 못했습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뭔가 섭섭했지만 용궁신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뭐, 했습니다.
그런 걸 꼭 말해야 아나하고 발걸음을 돌려 갈맷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갈맷길은 부산의 새인 ‘갈매기’와 ‘길’을 합성한 것이며 ‘갈매’는 순수 우리말로 ‘깊은 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갈맷길은 부산의 특성을 잘 담고 있어서 바닷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산 속이고 산을 벗어나면 강이 있고 몸이 노곤하면 온천이 반겨주는 사포지향의 길이라고 합니다.
갈맷길은 21개 구간 278.8킬로미터의 길입니다.
2023년 1월부터는 기존 장거리 구간을 분할하여 9개 코스 23개 노선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 올레길과 더불어 가장 인지도 높은 도보여행길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송정해수욕장
달맞이 길을 따라 해월정과 벚꽃단지를 지나다 보니 넓게 펼쳐진 백사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송정해수욕장이었습니다.
백사장의 길이는 1.2킬로미터이고 폭은 30에서 60미터, 면적은 5만 45만 4천 제곱미터이라고 합니다.
해운대해수욕장과 광안리해수욕장과 더불어 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입니다.
송정이라는 말은 소나무 숲에 정자를 세웠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해운대와 더불어 매년 1월 1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러 몰려오며 해운대보다 더욱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송정은 다대포해수욕장과 함께 대한민국 서핑의 메카이기도합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서핑이 시작된 곳입니다.
사계절 수온이 높고 파도와 바람이 파도타기에 적절한 정도라고 합니다.
이슬이 축축한 길을 돌아 송정해수욕장에 도착했습니다.
서핑과 바다수영을 하는 분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분들의 근육을 보면서 우리 몸은 참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체의 쥔장이 무엇을 위해 쓰고 싶은지를 잘 알아서 발달하고 숙성하는 것 같으니까요.
고운 모래 길을 걸었습니다.
파도를 상대로 밀당도 하고 팔짝 뛰면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보던 나 잡아 봐라도 하고.
바다는 사람을 풀어헤치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엔 늙지 않는, 녹슬지 않는 감수성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인 것 같았습니다.
그 감수성은 평소에는 깊은 곳에 있다가 이런 곳을 만나고, 본인이 원하면 꺼내질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주자주 꺼내서 벼리면 사물을 한 번에 베어버리는 명검처럼 우리들의 감성도 빛을 잃지 않고 빛이 날 듯했습니다.
이기대 길
이기대길은 현대적이고 잘 정돈된 대도시 부산의 모습과 해안 절경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을 선사하는 곳입니다.
이기대길은 약 2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선이 기묘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해안 일대의 암반들이 비스듬히 바다로 빠져드는 모습입니다.
‘이기대’라는 명칭의 유래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영의 향토 사학자 최한복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수영성을 함락한 왜군들이 경치가 빼어난 이곳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때 수영의 기생 두 명이 술에 취한 왜장을 끌어안고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때부터 이곳을 이기대라 불렸다고 합니다.
원래는 의기대가 옳은 명칭이나 후에 이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기대는 장산봉에서 동쪽 바닷가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기대길은 갈맷길 2코스 중 일부입니다.
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는 맛이 일품인 길이었습니다.
앞으로는 해안 절벽으로 이루어진 절경이 펼쳐지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와 광안리 일대의 고층 빌딩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기대길에서는 격랑에 몸서리치는 파도를 만났습니다.
바닷물이 격동했습니다.
바위에 부딪쳐 거품처럼 부서지는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파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아, 두울, 세엣.
바닷속 에너지가 하나 둘을 세는 동안 모아졌으므로 셋에는 바위를 치면서
물이 거품으로 격변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꿈틀거리는 바닷물에 눈을 고정시킨 채 숫자를 카운트했습니다.
그런데, 바다는 나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셋을 외쳤는데도 파도는 여전히 잠잠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과 방법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집중시켰습니다.
다시 카운트를 했습니다.
좀 전 과는 다르게 나의 기대를 내려놓고 에너지를 모으느라 꿈틀거리는 물을 응시했습니다.
셋에 혹은 다섯에 바위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포말로 흩어졌습니다.
매번 파도의 크기가 달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움직임이 큰, 격동하는 주는 즐거움을 만끽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모든 대상에게서 하나씩 둘씩 배워나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기대길 끝에는 오륙도해상공원이 있었습니다.
스카이워크라고 유리를 길 밖에 깔아 해변 낭떠러지
혹은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이 나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그 길이가 짧아서인지 만든 의도와는 다르게 그렇게 무섭지도 짜릿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대결은 늘 그런 식인 것 같았습니다.
인간이 흉내 내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흉내인 것입니다.
흉내는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
가짜는 마음을 움직이기에 역부족하다는 것.
지연에 또 한 번 감사했던 하루였습니다.
참 많이 움직였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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